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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2막을 준비하는 시기에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전공과는 무관한 용접공이 됐다. 낮에는 용접면을 쓰고 눈부신 불꽃을 일으키고, 밤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솔직 담백하게 글을 쓰며 내일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청년 천현우(30) 씨를 만났다. 배우고 싶어 들어선 용접공의 길천현우 씨가 용접공이 된 건 지난 2015년이다. 제조업종에 종사하며 조경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용접을 접했다. 아르바이트 당시 사수가 용접하는 모습을 어깨너머 보며 흥미가 생겼다. “용접이란 단어는 거칠고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어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처음 용접면을 쓴 순간, 제가 얼마나 편견 덩어리였는지 깨달았죠.” 불꽃이 튈 때, 납땜과 전혀 다른 그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시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져 공장일과 아르바이트까지 겸했기에, 돈을 들여 기술 공부를 하는 건 도박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당시 정부에서 취업성공패키지를 운영하는 걸 알고, 고용센터를 통해 용접학원에 등록했죠.” 취업성공패키지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해 생계 유지가 힘들었다. 버스비도 아까워 매일 2시간씩 뛰며 학원을 오갔다. 용접산업기사 자격증을 준비하여 필기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문제는 실기였다. 하루 3시간의 연습으로 실력을 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실기에 떨어지면 다음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학원에 양해를 구하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결과는 92점으로 합격. 학원 등록부터 자격증을 따기까지 총 4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자격증을 받아 오던 날,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용접공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취재 당일도 야간근무를 서고 작업복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이한 천 씨. 그의 작업복에는 용접 불꽃이 튀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지난 4월 ‘지방 청년의 생각’ SNS에 올려 공감대 형성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받은 상장도 제법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양하게 글을 썼어요. 저의 생각을 적은 SNS부터 순수 문학과 웹 소설 등 작가를 꿈꾸며 글을 썼죠. 10여 년 동안 공모전에도 여러 번 참여했지만 입상은 한 번도 못했어요. 그래서 ‘글에는 재능이 없구나’라고 생각 했죠.” 그래도 SNS에 자신만의 생각을 녹여 쓴 글을 일기처럼 쓰곤 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7일에 치른 재보궐선거에 대해 올린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고 공유 됐다. “당시 20대 남자들이 왜 민주당에 보복 투표를 던졌을까부터 해서 후보자들이 말하는 청년들은 왜 모두 수도권에 있는 취준생과 대학생들만 지칭할까. 수도권 외 청년들이 40%는 될 텐데 우리는 유령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썼어요.” 지방의 한 청년이 바라보는 현실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다. 이후 그의 글을 읽고 관심을 보인 언론매체에서 연락이 왔고, 현재 3군데 매체에 투고하고 있다. “낮에는 철을 녹여 물건을 완성하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완성하죠. ‘경향신문’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일기식으로 쓰고 있고, ‘피렌체의 식탁’에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면서 보이는 문제점에 대해 쓰고 있어요. ‘미디어오늘’에는 정치권 이야기를 현장의 청년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쓰고 있답니다.” 힘든 세상살이 겪으며 노동에 대한 인식 바뀌어전문대 2학년 2학기 현장실습을 하던 첫날 그는 산재를 당했다. 대기업 하청업체였던 당시 회사는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다. 현장실습이기에, 겨울방학까지 근무를 해야만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출근한 첫날. 정확한 업무지시도, 안전장치도 없이 그저 선임자가 알려주는 방법으로 혼자서 일을 해야 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내부가 400℃가 되는 온장고를 열어 뜨거운 액체가 든 40kg짜리 원형 통을 꺼내 옮긴 뒤 금속 틀에 쏟아붓는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은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여 일을 했지만 통이 워낙 무거워 결국 붓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발에다가 그 뜨거운 액체를 쏟아버리고 말았죠.”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너무 놀라 발을 얼른 빼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회사 사람들이 뛰어왔고, 사장도 왔다. 그는 그때 본 사장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떨리듯 말했다. “괜찮니?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어요. 저를 동네의원으로 데리고 가 항생제를 맞혔죠. 회사에서 해준 건 그게 전부였어요. 이후 치료는 제 돈으로 해야 했어요.” 그렇게 그는 발목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산재처리는 고사하고, 뒷날 쉬지도 못하고 정상 출근을 해야 했다. 발목에는 몇 번이나 고름이 났고 몇 날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때 다쳤던 발목은 지금도 울퉁불퉁하다. “산재처리 방법도, 산업안전보건법도 배워본 적 없었어요. 만약 그걸 알았다면 치료를 좀 더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안전하지 않는 환경에서, 처음 해보는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일을 하라고 하죠.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꾸준히 글 써서 제조업 현실 알리고 싶어”“지방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많이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똑같은 업무를 맡아도 왜 임금 차이가 그렇게도 많이 나는지, 더욱이 젊은 여성들은 성차별과 유리천장을 겪으며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현장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그 현실을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항상 이야기하는 숫자가 있어요. 8·40·250.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일하며, 월급은 최저 250만 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이 너무 많죠.”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자리 잡았으면 했다. 내일배움카드·내일채움공제·일학습병행제가 서로 잘 융합되어 청년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전 서울을 방문한 일이 있었어요. 제가 직접 용접한 전철이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용접공으로서 더욱 성장하고 싶고, 또 지금까지 썼던 글을 모아 책도 출판할 계획입니다.” 용접공과 작가로서 하루하루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천현우 씨. 제조업에서 일하며 지방 청년의 목소리를 더욱 내고 싶다는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경남공감 2021년 10월호) 글 배해귀 사진 김정민
21.10.12.산업안전 관련 경력 재능기부로 산업재해 예방에 도움…큰 보람
눈만 뜨면 산업재해가 일어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김용균법’이 제정됐어도 꽃다운 청춘이 산업재해로 스러지곤 한다. 안전 매뉴얼만 제대로 지켜졌다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함께 인지하고 실천했다면, 항상 안전에 유의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어 있었다면, 관리·감독이 철저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다. 산업재해를 줄이고, 경각심을 높이고자 경남도가 예방 차원에서 운영하는 ‘산업안전지킴이’ 활동을 취재했다. “그때 그날의 끔찍한 사고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경남도는 산업재해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전기·가스·에너지 등 산업안전 분야에서 종사했던 사람들 중에서 ‘산업안전지킴이’를 선발해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사업 수행기관인 경남인생이모작센터는 지난 7월 11명을 뽑아 산업안전보건법령, 현장방문 활동 요령, 작업장 안전관리 유형별 사례 등을 교육했다. 이들은 도내 20인 미만 산업안전보건 자율관리대상 사업장에서 8~12월 5개월간 산업안전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9월 1일 이번에 산업안전지킴이로 선발돼 활동하고 있는 이종철(63) 씨와 함안군 산인농공단지에 있는 ㈜GES(대표 안병종)를 찾았다. ㈜GES는 선박엔진에 들어가는 전기패널 등을 제조 생산하는 중소기업이다. 이 씨는 대학에서 용접공학을 전공하고, 1980년부터 2000년까지는 삼성중공업에서, 2012년 12월까지는 두산엔진(주)에서 일하고 명예퇴직했다. 그가 산업안전지킴이 활동에 나선 것은 자신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옛날 자신이 몸소 목격한 안전사고와 유사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시운전하는 선박엔진에서 큰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시운전 요원과 입회해있던 해외 감독관들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끔찍했던 충격적인 장면이 생생합니다. 인명사고도 컸습니다.” ㈜GES 등에서 산업재해 예방 활동 그는 ㈜GES를 포함해 여러 군데를 다니며 산업재해 예방활동을 하고 있다. 제조업체별로 제조 공정을 파악하고 위험요소가 있는 곳에서는 작업자와 협의해 예상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과거의 안전사고 사례를 들려주며 공유한다. ㈜GES 회사 정문을 들어서 보니 회사는 매우 깔끔했다. 산업재해가 일어날 만한 사항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실 ㈜GES는 상당히 산업재해예방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소개하는 이유는 여기처럼 정리정돈을 철저히 하면 산업재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GES 안병종 대표를 만나보니 현장이 깨끗한 이유가 있었다. 안 대표는 전기패널 생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현장주의자였다. ㈜GES의 주요 고객사는 두산엔진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다양하다. 고객사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안전수칙에 철저하다. 덕분에 사세도 확장되고 있다. 110평 규모의 회사는 인근의 300여 평 규모로 이전할 계획이다. (<경남공감> 10월호가 발행될 즈음엔 이전을 완료한 시점일 거라고 했다) 주 5일제를 지키며 직원의 복지를 챙기고, 회사의 재무 상태를 직원과 공유하는 투명경영을 하며, 현장의 안전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것이 사세 확장의 비결일지도 모르겠다. 근무 4년 차 직원 황태원(43) 씨도 “다른 회사에서도 근무해본 적이 있는데 여기만큼 정리정돈과 청결에 철두철미한 곳도 없습니다. 사장님이 작업공구를 공구함에 넣지 않고 작업대에 놓게 한 것도 작업 효율성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실제 공구함에 넣어놓으면 뒤죽박죽 섞인 공구를 찾느라 제법 시간이 걸리거든요. 덕분에 작업효율도 높고 사고 없는 안전한 작업환경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거든다. ‘3정 5S’만 지켜도 산업재해는 없을 것이종철 씨는 ㈜GES처럼 모든 사업장이 ‘3정 5S’만 지켜도 산업현장에서 재해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3정은 정품, 정량, 정위치다. 정해진 제품을, 정해진 분량, 정해진 위치에 놓는다는 의미다. 5S는 Sifting(정리), Sorting(정돈), Sweeping(청소), Standardizing(표준화), Sustaining(유지)을 뜻한다. ㈜GES의 안전수칙과 흡사하다. “가운데 복도를 한 번 보세요. 공간이 충분하고 주변이 말끔하지요. 크레인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놓은 것입니다. 다른 사업장에 가면 여기저기 물건이 쌓여있고 이런 공간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도 많아요. 그건 곧 작업자가 이동 중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높아지지요. 정리정돈, 공간 확보가 그래서 중요합 니다.” 이 씨는 자신의 산업안전지킴이 활동으로 산업재해 예방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며, 많은 사람들이 ㈜GES 같은 중소기업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GES는 작은 기업입니다만 아파트 3~4층 규모의 선박엔진에 들어가는 중요한 전기 패널을 만듭니다. 기술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앞으로도 산업안전지킴이 활동을 열심히 해서 경남의 산업재해율을 낮추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김용균법 =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다. 2018년 12월 27일 국회를 통과해 2020년 1월 16일부터 시행됐다. 법안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당시 24세) 씨가 운송설비 점검을 하다가 사고로 숨지는 비극이 일어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뤄지면서 ‘김용균법’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주요 내용은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위한 도급 제한 ▲도급인 산재 예방 조치 의무 확대 ▲안전조치 위반 사업주 처벌 강화 ▲법의 보호 대상 확대 등이다. 산업안전지킴이 = 산업안전지킴이의 정확한 명칭은 경남 중소기업 산업안전지원단 ‘산업안전지킴이’다. 산업현장 내 잠재돼 있는 재해(기계에 신체의 일부가 끼이는 협착, 전도, 추락) 위험 요인을 사전 발굴해 산업재해 발생을 제거하고 안전점검으로 자율참여를 유도해 산재 예방 의식을 높이는 활동이다. 경남도가 경남인생이모작지원센터를 통해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전기·가스·에너지·보건·환경·화학 등 산업안전 전문분야에서 10년 이상 재직 경험이 있는 신중년 퇴직 전문인력으로 구성된다. 도내 20인 미만 산업안전보건 자율관리대상 사업장이 대상이다. 10여 명이 5개월간 500개사를 방문해 ▲유해·위험기계 등의 방호조치 지도 ▲산업안전 점검표(체크리스트) 작성 등 작업환경 안전사항 교육 ▲추락·전기·중량물 취급 등 안전조치 사항 점검 ▲각종 지원제도 안내 ▲안전 관련 자료 배포(USB·안전표지) 등 안전점검 활동을 한다. 지난해까지 안전지킴이 39명이 안전점검을 1397회 했고, 이번 해에는 안전지킴이 11명이 500회의 안전점검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도는 최근 안전보건관리 전문가도 채용해 안전문화를 전파·확산하고 있다. (경남공감 2021년 10월호) 글 박정희 사진 김정민
21.10.12.제14회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 대상 수상 박영국 씨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는 2007년부터 열리고 있다. 사라져가는 소중한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애향심과 공동체 정신도 함양한다는 취지다. 경남도가 주최하고 경남문화원연합회가 매년 10월 전후로 열고 있다. 지난해 11월 창녕문화원에서 열린 제14회 대회는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총 21팀 중 경남도지사상인 대상을 수상한 일반부 박영국(75·창녕군 장마면) 씨를 지난 9월 초 찾았다.박영국 씨는 사투리를 별로 쓰지 않았다. 대회 당시 그가 제출했던 원고를 보고 평소에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분이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봉화마을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다녔으나, 마산고로 진학하면서 ‘도회지’에서 주로 생활했다고 했다. 마산에서 공무원 생활도 오래 했단다. 현재는 창녕문화원 회원이자 봉화마을 이장이다. “6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자의반타의반 이장을 맡게 됐고 마을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백배 즐겁고 행복합니다. 어려운 이웃도 돕고, 사업비도 따내고, 마을가꾸기사업에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제14회 경상도사투리 말하기 대회는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별로 영상녹화를 하고, 이를 심사위원들이 심사했다. 이야기의 참신성도 중요했고, 제한시간 5분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박 씨의 발표는 내용도 좋았고, 대회 규정을 잘 지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 내용은 어릴 적 친구들의 생활을 떠올리며 구상했습니다. 고쳐 쓰고 다듬느라 원고 쓰는 데만도 1주일 넘게 걸렸고, 이를 외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이가 있으니 잘 외우기가 힘들더군요.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되뇌기도 하면서 1주일 넘게 외웠답니다. 대상을 받아 참 기뻤고, 사투리를 널리 알리고 보전하는 작업도 지속됐으면 합니다.” 1950~60년대는 전국 어디랄 것 없이 대한민국이 가난한 시절이었다. 박 씨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동네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과거를 돌아보고 또 지역 언어에 관심을 갖게 하자는 취지에서 대회에 임했다고 했다. 다음은 박 씨의 대상 수상 원고와 해설이다. (발음나는 대로 적은 원고여서 사투리 표기와 다를 수 있다) 원문“내가 옛날이바구 함 해보까예?” 초근목피 라는 말 한분쭈믄 들어밨지예? 옛날에는 쌀이 업서가 태반은 굴멌다카모 요시 절믄 아-들은 라면 쌀마묵지예 안캅니꺼. 감꽃피모 울 집에 오지마라 카던 시집간 딸래미의 한매친 절규가 이때부터 생긴 말인 강 시픕니더. 봄 대모 양석이 다 떠러지고 안굴믈라꼬 장리쌀을 어더묵던 그 시절에 쌀 한 말 장리로 무그모 가실에는 한말 가오지를 가파야 했던기라에. 엥가이 산다카는집도 지사 때나 설파럴 양밍절 때 아이모 맨자지밥은 깅하기 애러밧서예. 피죽도 배불리 못 묵던 그때 쌀이 울매나 기했던지 쌀 한 내끼 더 소출 낼라꼬 태비 만들기에 눈이 뻘개썹니더. 개똥을 마이 주우로 댕기샀다 아임미꺼. 약 할라꼬 개똥을 주우께씀니꺼? 그기 아이고예. 그때는 비료가 비쌌고예 엥가이 기했슴니꺼. 태비거름을 맹글어가 비료대신에 썼다아입니꺼. 태비거름을 맨들라카모 소마구 바닥에 새시랭이로 보리짚이나 나락딩기를 깔아주고 소가 똥이나 오줌을 누게 대모 그걸 사키고 썩게 해가 맹그는기 태비라예. 소똥만 가꼬는 태비재료가 모지랑께 보충을 할라꼬 동네 쭈욱 댕기면서 개똥을 줍는기라예. 개똥도 먼지 본 놈이 임자라꼬 날이 희꿈하모 새벽부터 개가 마이 댕기샀는 저 산먼댕이까지 댕기야 개똥을 마이주웄고 저건니 배껏꿈타 작포때기 양반은 아침아래 벌씨로 개똥을 두소구리나 주웄다카는 이박도 수울케 들어쌌슴미더. 소마구바닥에 까는 보리짚도 기해가꼬 산이고 들이고 풀이라카는 풀은 나 비가꼬 거불을 했다 아입니꺼. 요시야 길까고 오데고 온 천지에 거불꺼리지마는 그때는 풀도 와그리 기했등가예. 거불한다꼬 논뚜렁이나 너무밭 깍단에 풀비다가 들키가꼬 도망댕기고, 너무산 메똥까 짠대기 파다가 들키가꼬 지게도 뺏끼뿌고 해사심미더. 그라민서도 지게 바잘개가 넘치도록 한그썩 지고와서 배껏마당 거튼데 산떠미 맹키로 모다가 태비를 맹그렀지예.. 그때는 요시맹키로 화장지가 오데 있어예? 신문지나 조오쪼가리도 업서가꼬 통시깐에 가모 볏짚이나 새끼를 달아매놓고 뒤처리를 해꼬예, 우짜다가 호박잎사구나 감이파리로 똥구녕을 딱다가 그기 빵꾸가 나모 손가락에 묻어가꼬 낭패해하던 시절. 수굼포나 호메이로 땅에 파무끼도 했다아임미꺼. 아-들 공부는 지대로 했게슴미꺼? 핵교끝나고 집에오기가 바뿌게 책보따리 던지뿌고 아무도 엄는 집에 삽짝문 걸어너코 소꼴케로 가야제, 소몰꼬 소매기로 산에 가야제, 옴마 아부지 들일하구로 동상들 델꼬 놀아야지예. 그라다가 동상들 배고파 울모 정지에가서 부뚜막에 안챠노코 살강에있는 보-쌀 쌀믄기라도 밥공지에 퍼서 찬짱에있는 물이맷국에 말아 미기던 그런때- 무슨 공부할 여가가 있었겠슴미꺼? 금방 밥묵고 뛰모 배 까바진다꼬 걸음도 살살 걸어라카고, 석유지름 애낀다꼬 공부그만하고 불끄고 빨리 자라고하던 이비기만 듣꼬 살았다봉께 시방 좋은시상과 너무 격세지감이 마이 들어 잠시 옛날 이박 함 해밨슴미더. 부끄럽꼬 미얀합니데이~! 해설 “내가 옛날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초근목피 라는 말 한 번쯤은 들어봤지요? ☞풀뿌리와 나무껍질. 곡식이 떨어졌을 때 먹는 험한 음식. 극심한 빈곤 상태를 의미. 옛날에는 쌀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었다고 하면 요새 젊은 사람들은 라면 삶아먹으면 되지요 라고 합니다. 감꽃 피면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하던 시집간 딸의 한 맻힌 절규가 ☞감꽃 피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 춘궁기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친정어머니가 딸집에 와도 대접할 것이 없으므로 오시지 말라고 했다는 의미. 이때부터 생긴 말인 성싶습니다. 봄이 되면 양식이 다 떨어지고, 안 굶으려면 장려 쌀을 얻어먹던 그 시절에 8킬로 정도 되는 쌀 한 말을 장려 쌀로 먹으면 가을에는 한말 반을 갚아야 했습니다. 어지간히 산다는 집도 제사 때나 설날과 추석 양 명절이 아니면 쌀로만 지은 밥은 구경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무껍질로 만든 죽도 배불리 못 먹던 그때 쌀이 얼마나 귀했던지 쌀 한 낟알이라도 더 수확하려고 퇴비 만들기에 눈이 벌갰습니다. 개똥을 많이 주우러 다녔다는 말입니다. 약에 쓰려고 개똥을 주웠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때는 비료가 비쌌고, 참으로 귀했습니다. 퇴비 거름을 만들어서 비료 대신에 썼답니다. 퇴비 거름을 만들려면 소 마구간 바닥에 쇠스랑으로 보리 짚이나 볏겨를 깔아주고 소가 똥이나 오줌을 누면, 그걸 삭히고 썩게 해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소똥만으로는 퇴비 재료가 모자라서 보충을 하기 위해 동네를 다니면서 개똥을 주웠습니다. 개똥도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서,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부터 개가 많이 다니는 저 산마루까지 다녀야 개똥을 많이 주울 수 있었습니다. 저 건너 바깥마을 창녕작포마을 댁 남편은 아침 식전에 벌써 개똥을. 두 소쿠리나 주웠다는 이야기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소 마구간 바닥에 까는 보리 짚도 귀해서 산이고 들이고 풀이라는 풀은 다 베어서 거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새야 길가든 어디든 온 천지에 거름할 거리가 많지만 그때는 풀도 참 귀했습니다. 거름을 하기 위해 논두렁이나 남의 밭 언덕의 풀을 베다가 들켜서 도망 다니고, 남의 산 산소 주변의 잔디를 파다가 들켜서 지게를 뺏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게 발채가 넘치도록 많이 지고 와서 바깥마당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모아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화장지가 어디 있었나요? 신문지나 종이 쪼가리조차 없어서 화장실에 가면 볏짚이나 새끼를 달아놓고 뒤처리를 했습니다. 어쩌다가 호박잎이나 감잎으로 항문을 닦다가 거기에 구멍이라도 나면 손가락에 묻어서 낭패를 보던 시절이었지요. 삽이나 호미로 땅에 파묻기도 했답니다. 사정이 이러니 아이들이 공부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학교 끝나고 집에 오기가 바쁘게 책보따리 던지고 아무도 없는 집에 사립문을 걸어놓고 소 풀 뜯어먹이러 가야했습니다. 소 몰고 소먹이러 산에 가야지요, 엄마 아버지 들일 하시도록 동생들 데리고 놀아야지요, 그러다가 동생들이 배고파서 울면 부엌에 가서 동생들을 부뚜막에 앉혀놓고 부엌 선반에 있는 보리쌀 삶은 거라도 밥공기에 퍼서 찬장에 있는 오이냉국에 말아 먹이던 그런 때,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요. 금방 밥 먹고 뛰면 배 꺼진다고 걸음도 살살 걸으라고 했고 석유기름 아낀다고 공부 그만하고 불끄고 빨리 자라 고하던 이야기만 듣고 살았다 보니 오늘날 좋은 세상과 너무 격세지감이 많이 들어 잠시 옛날이야기 한차례 해봤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경남공감 2021년 10월호) 글 박정희 사진 김정민
21.10.12.“건강비결이랄 게 뭐 있나? 허허 뭐든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지”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건강하게 장수하는 이는 드물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수명은 길어졌으나 의료기술에 기대어 질병을 앓으며 오래 사는 것일 뿐 삶의 질이 그만큼 더 좋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고도 한다. 그래서 찾아봤다. 어느 TV 프로그램의 ‘자연인’처럼 굳이 자연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평범하게 장수하는 이는 없을까. 덧붙여 삶의 스토리가 남다른 이는 없을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말, 제보를 받고 달려가 봤다.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에 사는 94세의 정차종 어르신은 듣는 것만 약간 불편할 뿐 허리도 꼿꼿하고 체력도 좋았다. 어르신의 긴 얘기를 듣느라 오히려 취재진이 녹초가 됐다. 일기장, 가계부 그리고 성경 필사…기록의 달인 어르신 연배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듯 정차종 어르신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격동의 대한민국을 몸소 겪으며 질곡의 세월을 살았다. 남보다 덜 평범한 가족사에 외롭게 컸고, 젊은 날 돼지장사, 양봉업 등 닥치는 대로 일해서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다. 학교를 변변히 다니지도 못했다. 일제강점기, 9살 무렵인가 야간소학교를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고, 호탕하고, 긍정적이며, 호기심에 가득차 있다. 지금도 TV를 시청하다가도 모르는 게 있으면 벌떡 일어나 사전, 옥편을 들고 찾아본다.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기록의 달인’이다. 늘 일기를 썼고, 가계부를 썼다. 대표적인 자랑거리는 성경 필사. 취재진에게 보여준 한 아름의 공책은 400여 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성경책을 정성스레 베껴 쓴 기록이다. 글씨도 일관되고 단정하다. 매일 얼마나 필사했는지를 기록한 공책 맨 뒷부분에는 2015년 2월 19일 창세기부터 시작해 2016년 3월 10일 요한계시록까지 마무리했다고 돼 있다. 88세에 시작해, 89세에 385일 만에 썼으며, 공책이 17권, 볼펜은 수십 자루 쓰였다고 돼있다. 주일 빼고, 몸살 앓은 며칠을 빼고 하루도 빠짐없이 필사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보통의 교인들도 그 정도로 필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대단하다 싶다. 남몰래 선행, 지역 언론에 실리기도 매일 성경을 읽다가 필사까지 하게 된 건 당연히 신앙심 영향이겠지만, 그에겐 신앙심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젊은 날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할 때도 남을 속여야 먹고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불의를 멀리하고 스스로 선행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갖고 살았던 셈이다. 실제로 그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했다고 전한다. 쑥스러워하며 보여주는 노트에는 그의 선행기사가 스크랩돼 있다. 남한테 자신의 선행은 한사코 숨겼는데, 기사로 보도된 건 또 어찌 알고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1998년 모 지역언론 취재 수첩 난에 ‘천사 같은 할아버지’ 제목으로 실린 내용이 어르신의 사연이라고 했다. 자신도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을 텐데 방송국을 찾아 수재민을 위해 100만 원을 내놓는가하면 백혈병으로 고생한다는 소년을 위해 30만 원을 동사무소에 맡기기도 했다는 내용이다. 수준급의 짚풀공예 실력, 농기구 제작…일명 ‘정 가이버’ 어르신은 손재주가 좋다. 보여달라고 했다. 허허 웃으시며 그간 만들어놓은 농기구며 짚풀 공예품을 자꾸 꺼내놓으신다. 쟁기, 지게, 짚신, 수수 빗자루, 양철 소쿠리 등등 수십 개다. 시연을 해 보이시기도 했다. 90세가 넘는 어르신의 솜씨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꼼꼼하다. 그만 보여주셔도 된다고 하기가 죄송스러울 지경이었다. 손수 만든 농기구는 더러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고 살지만 손재주로 짚풀 공예품을 팔기도 했다. 돈 안 받고 남한테 주는 경우가 더 많은 건 물론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매우 검소했다. 딸이 준 시계의 줄 하나가 망가진 것도 버리지 않았다. 고쳐서 단 시곗줄은 원래의 시곗줄에 버금갈 정도로 정교하다. 어째서 그리 손재주가 좋으시냐했더니, “나도 모르지, 그냥 되던데”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정 가이버’라 불릴 만하다. 평생 아내 존중해 존댓말…자신만의 악보로 악기 연주 창원시 동읍 본포가 고향인 어르신은 18세에 윤경년(92) 할머니와 혼인했다. 올해로 결혼 72주년이다. 거실 벽 한 편엔 자식 손자 수두룩한 결혼 70주년 기념사진이 자랑스레 걸려있다. 어르신은 그 연세에도 허리가 꼿꼿하지만 할머니는 등이 굽었다. 어르신 말로는 젊은 날 갖은 고생을 해서라고 했다. 어르신에 비해 할머니는 잔병이 많기도 했다. 그래도 부부가 해로하는 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커서인 듯했다. 어르신은 할머니에게 지금도 말을 놓지 않는다. 늘 존대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해왔다. 거실에 놓인 침대 위에는 할머니가 연주한다는 피아노와 할아버지가 연주하는 트럼펫, 색소폰, 하모니카 등이 놓여있다. 할머니도 손주가 보내준 피아노로 수십 년을 마음가는대로 연주하며 즐겁게 생활해왔다. 부부는 평생 그렇게 같이 찬송가를 연주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악보를 잘 볼 줄 알아서가 아니었다. 어르신은 실제로 악보도 모른다. 나름대로 개발한 악보로 연주했다. 7음계를 숫자로 표시해서 연주하는 것이다. 도는 1, 레는 2, 미는 3 이런 식이다. 참 독특하고 기발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이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기도 하련만 어르신에게 불가능은 없어보였다. 색소폰을 배운 것도 87세란다. 건강 비결은 거리낌 없고 자신을 믿는 의지 가득한 삶의 자세 어르신은 고정적으로 먹는 약도 없고 병원에도 잘 가지 않는다. 80세 넘어 짚풀 공예품을 다른 지역에 갖고 가느라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크게 사고가 난 적이 있긴 했으나 병원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부지런하며, 아내와 늘 대화하고 소통한다. 측은지심을 갖고 살아간다. 남몰래 남을 잘 돕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화나면 화를 내고 또 금방 푼다. 믿음이 있고 의지가 강하며 삶을 긍정하고 감사해한다. 100세를 바라보는 데도 어르신이 건강한 건 이런 영향이 아닐는지.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 건강비결이다. 어르신도 말한다. “건강 비결이 뭐 있나. 마음에 거리끼는 것 없이,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그저 열심히 살았지. 허허.” 도민 여러분의 건강한 사연을 기다립니다. 도민과 나누고 싶은 장수사례, 건강회복사례가 있으면 제보해주십시오. dobo@korea.kr (경남공감 2021년 9월호) 글 박정희 사진 김정민
21.09.06.통영 스타트업 웰피쉬 정여울 대표
코로나19로 수출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가던 수산물 재고에 관심을 가진 이가 있다. 단순한 재고 처리 수준이 아닌 소비자들이 원하는 편리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으로 개발했다. 국내 재고 수산물 솔루션 스타트업 웰피쉬(주)(WELL-MADE FISH) 정여울(31) 대표를 만났다. 통영 수산물 사업 마인드 대학 때부터 키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정여울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통영 수산물을 먹고 자랐다. 통영에서 수산업을 하는 삼촌 덕이었다. “누구나 신선하고 맛있는 수산물을 먹는 줄 알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 엠티 때였어요. 통영 장어를 가져가 구워 먹으니 다들 너무 놀라더라고요. 이렇게 신선하고 맛있는 장어를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고, 친구네 부모님들은 저에게 장어를 주문하셨어요.” 정 대표는 그때의 경험으로 신선한 수산물을 산지 직송으로 받아먹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통영 수산물로 사업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직거래플랫폼 창업 → 재고 가공산업으로 눈 돌려 2019년도에 통영의 수산물과 서울의 매장을 직접 연결해 주는 플랫폼 ‘사시사철’ 수산물 직거래 플랫폼을 만든 정 대표는 창업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수산물은 공급량이 항상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냉동으로 보관하는데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시더라고요. 그런데 외부인인 저는 그게 당연하지 않았어요. 애초부터 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원물로 보관하지 않고 가공을 해 부가가치를 높이면 경쟁력도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죠.” 신선한 수산물 제공과 원활한 수산물 소비를 위해 수도권에 직영매장 운영과 함께 음식점 오픈도 준비했다. 그러나 시기가 맞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음식점은 열지 못했고 배달 전문매장을 빌려 레시피 개발에 몰두했다. 메뉴는 정 대표가 어렸을 때부터 맛있게 먹었던 통영 바닷장어를 활용했다. 우리나라 바닷장어의 70%가 통영에서 생산되고 있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며, 코로나19로 일본 수출길이 막히고 국내 소비량도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바닷장어를 고등어처럼 쉽게, 나아가 다양한 우리나라 수산물을 식탁 위로 올려보자는 생각으로 삼시 세끼 장어만 먹으면서 맛을 연구했어요. 매주 통영에 내려가 어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쉴 새 없이 달렸죠.” 이후 푸드 스타트업 대표와 셰프로 구성된 자문단과 함께 수산물 활용 레시피를 개발해 총 100여 가지의 레시피를 만들었고, ‘통영팔팔장어 홈키트’를 제작해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좋은 반응도 얻었다. ‘통영팔팔장어 홈키트’ 탄생…통영 본사, 서울 지사 학교의 도움과 지원 사업으로 창업을 시작한 정 대표는 신선한 수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처와 사무실이 필요했다. “무작정 통영으로 내려가 통영시청을 찾아갔어요. 자료를 들고 가서 하고 싶은 사업을 설명하며 도와달라고 했어요. 어떤 분은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또 어떤 분은 사회적 기업도, 협동조합도 아닌 개인사업자를 우리가 왜 도와줘야 하냐고 하셨어요. 충격이 컸죠.” 통영에서 꼭 회사를 설립하고 싶었던 정 대표의 마음은 간절했다. 그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창업공간을 빌려주는 통영리스타트플랫폼에서 입주기업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행히 입주회사로 선정됐고, 이후 서울에는 통영 수산물을 가공할 업체와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할 지사를 두었어요. 통영 수협에서 수산물을 구입하고, 통영리스타트플랫폼 입주회사로 소개하며 통영시청도 꾸준히 찾아갔죠. 지금은 수산과와 협업도 진행하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답니다.” “많은 청년이 수산업 도전 가능한 허브 구축하고파” 그는 장어 홈키트에 이어 멸치, 명태 등을 이용한 ‘드렁큰피쉬’라는 브랜드로 술안주를 만들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수산물은 밥이 아닌 술과 함께 즐기는 것’이라는 소비자의 인식을 알게 됐고, 또 시중에 나와 있는 기름에 튀긴 명태 껍질 제품에 부담감을 느끼는 소비자의 니즈를 파고들어 기름 없이 구워서 만들었다. 그는 안주 시장에서 수산물 전문 안주라 하면 ‘드렁큰피쉬’를 떠올릴 수 있도록 집중할 계획이다. 이후 제품을 늘려 수산물 간편식도 만들 예정이다. 그 진행형으로 통영시청 수산과와 협업해 개발한 톳만두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창업 후에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며 한국수산벤처대학을 입학한 그는 경남도 청년 지역창작자 육성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또한 해양수산과학기술진흥원 주관 해양수산 창업 콘테스트 사업화 부문에서 최우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산물 재고 제품이 가치를 인정받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동시에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매번 수산물 창업 지원사업에 신청하는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좀 더 다양한 수산물 창업 지원 사업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소부장이 아닌 다양한 수산물 스타트업을 할 수 있도록 문화와 정책이 형성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청년들이 진입 장벽이 높은 수산업에 도전할 수 있도록 수산물 공급부터 제품개발, 판로 확대까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허브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창업 이후 매주 서울과 통영을 오가며 다양한 수산 식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 대표. 그 과정에서 통영 어민들과 함께 성장하며 수산업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웰피쉬가 수산업의 새로운 기준이 되길 기대한다. (경남고감 2021년 9월호) 글 배해귀 사진 김정민
21.09.06.